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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6. 16世 〉34. <태사공>첨지중추부사공휘형진행적(僉知中樞府事公諱亨晋行蹟)
1. 문헌 목록 〉17. 17世 〉1. <요재공>덕호공휘후동묘갈명(德湖公諱垕東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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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태사공>예조정랑공휘형겸묘갈명(禮曹正郎公諱亨謙墓碣銘)
<태사공후>예조정랑공휘형겸묘갈명(禮曹正郎公諱亨謙墓碣銘) 有需其衣士其行儼然持書弊踵門而諸者曰余湖南之淳昌人趙尚岳其名也余之先人生而有儁才幼而有惇行壯而專篤之學老而不改其淡泊之志年六十有四位不過五品以歿當世之人鮮有知其名者惟墓幸有石將所以發潜詔遠顯耀我先人者非立言君子其誰望之遂起而再拜又奉其所撰狀德之文以進曰噫余晚生也先人之事余所不及知者多矣幸而知之具在是是亦可以傳吾先人也唯執事圖之又起而拜余既以不文辭辭不獲則取其狀而讀之曰信矣子之所以顯其親也夫俗之彌文也久矣觀乎人之墓志家牒純德全才賢人君子比肩而立於世也然而人終莫之信者何哉以其文勝也今子狀其親之行而其辭之不侈若此人其有不信乎既信矣若得立言君子而托之其又有不顯乎惜乎余非其人也按狀公諱亨謙字子益淳昌之趙出自麗朝太師公諱璵世有顯位公曾祖諱國賓祖諱文奎考諱光修皆不仕姚天安全氏學生命昌女直提學翔九世孫也公生甫孩提己以器度稱鄕里嘗挾册遊鄉塾足跌墜深潭中及援出猶手執書不釋幼讀禹貢五遍誦不失一言遂治明經業登英宗丁卯丙科由成均館學正出為青嚴道察訪家距官舍五十里親具膳烹調定衣冠先嘗而後馳獻于其親比去官無一日曠秩滿陞成均典籍宗簿主簿歷兵曹佐郎吏曹佐郎禮曹正郎兼春秋館記注館文臣兼宣傳官黃海咸鏡全羅三道都事而卒其生以甲午其卒以以丁酉葬於淳昌郡之白嚴村抱卵而其室淑人慶州崔氏附僉知中樞府事仁徵之女也有二女婿宋烜楊秀宗再娶清州韓氏舜采之女竟無子以其姪尚岳又以其姪弘錫為嗣尚垕尚必公之側室也尚垕有一男方幼公遊宦在京師數十年常泊然若無所求名姓不通權貴人以為拙然余嘗聞公侄尚直以明經公都會初擇公問曰汝能盡通乎對曰非能盡也適遇其素所熟知也公作色曰汝以僥倖取科第是自欺有司也郎撻之不令覆試鳴呼公豈真拙者也哉枉道而求仕官非其志也銘曰 學以為己非其誦流 仕以為親屈於督郵 有擴单而有石皎而 盹盹孝子刻以表之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禮曹正郎兼春秋館記注館趙公墓碣銘 崇禎紀元後三己巳五月立 通訓大夫吏曹參議兼奎章閣檢校直閣 豐山 洪奭周撰 예조정랑공휘형겸묘갈명(禮曹正郞公諱亨謙墓碣銘) 선비의 옷을 입고 선비의 행실을 하며 엄연히 글과 폐백을 가지고 문에 이르러 청한 자가 말하되 나는 호남의 순창 사람 조상악(尙岳)이라 하였다. 내의 선인이 나면서 영 특한 재주가 있고 어려서 도다운 행실이 있으며 커서 학업을 돈독히 하고 늙어 그 맑 고 꾸밈이 없는 뜻을 고치지 아니하다가 나이 六十四세에 五금의 미관으로 별세하니 당세 사람이 그 이름을 아는 자 적으나 오직 묘소에 다행히 돌이 있어 잠신 것을 날여 멀리 가르쳐 나의 선인을 빛나게 나타낼나면 말을 바로 세울 군자 아니고 그 뒤에에 바라리요. 마침내 일어나 두번 절하고 또 그 찬슬한 행장을 받들어 올리며 가로되 나는 만생(晩生)이라 선인의 사행을 미쳐 알지 못한 것이 많고 아는 것이 이뿐이니 이로써 우리 선인을 전할 것인가. 오직 집사는 도모해 달라하고 또 일어나 절하였다. 내가 이 미 글을 못한다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 그 행장을 받아 읽으며 가로되 진실하다. | 대의 어버이 현양할 마음이여 무릇 세속의 글로 국민이 오래라 사람의 묘지와 보첩을 보면 순전한 재덕을 갖춘 현인 군자가 어깨를 겨누어 세상에 섰으나 사람이 마침내 맞이 안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글이 실상을 이긴 때문이다. 이제 그대가 그 어버이의 사행을 쓰고 그 말을 보태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맞이 안하겠는가? 이미 믿으니 만일 말을 바로한 군자에게 부탁하면 그 또 나타나지 안함이 있겠는가. 내가 그 사람이 아님이 애석하도다. 행장을 살피니 공의 휘는 형겸(亨謙)이요 자는 자익(子益)이며 순 창조씨인데 고려 대사공 휘 여(璵)로부터 대로 이름있는 벼슬을 계승하였고 증조 휘 국민(國賓) 조휘 문규(文奎) 고휘 광수(光修)는 다 벼슬 아니하였으며 비는 천안전씨 (妣天安全氏) 학생명창녀(學生命昌女)로 직제학익(直提學翊)의 九세손이었다. 공이 어 려서부터 이미 기우와 도량으로써 향리의 칭찬을 받고 일찍 책을 끼고 서당에 사다가 발이 미끄러져 깊은 곳에 빠졌는데 끌어내니 오히려 책을 잡고 놓지 아니하였다. 어려 서 서전우공(書傳禹貢)을 읽으며 권 련송에 한구절도 빼지 않고 마침내 장경과 문을 공부하여 영종정묘(英宗丁卯) 병과에 올라 성균관 학정을 지내고 외직으로 청암도 찰 방이 되었는데 집과의 거리가 五十리로되 몸소 반찬을 숙정하고 의관을 바로하여 먼저 마본뒤에 달려가서 그 어버이께 드리고 하루 결근도 아니하였다. 과만(苽滿)후에 성균 관 전적에 올라 종부 주부 병이좌랑을 지내 예조정랑 겸 춘추관 이주관문신 겸 선전관 황해 함영 전라 三도 도사를 지내고 갑자(甲子)생으로 정유(丁酉)년에 졸하여 순창군 백암촌유좌(白岩村西坐)에 장사하였으며 배 슥인 경주최씨(配淑人慶州崔氏)를 부장하였는데 첨지중추부사 인증(仁徵)지녀였다. 그녀를 두어 송烜(宋烜) 양수종(楊秀宗)처요 계배는 청주한씨 순채(舜采)녀로 마침내 아들이 없어 그 족하 상악(尙岳)과 홍석(弘錫)으로 후사를 삼고 상후(尚垕) 상필(尚弼)은 공의 측실이었다. 공이 관직으로 수수년 서울에 있을 때 항상 청백하여 명성을 탁치않고 견문을 찾아 아니하니 사람이 졸하다. 하였으나 내가 일찍 듣건대 공의 족하 상직(尚直)이가 명경과(明經科)에 올라 배알하 니 공이 물어 가로되 내가 능히 다 통했느냐 대답하되 다 통치 못하였으나 마침 잘아 는 사람을 만난 때문이라 하니 공은 낯빛을 변하고 가로되 내가 요행으로 써 과거에. 오른 것은 자신을 속인 것이요 유사를 속인 것이라 하며 곧 매를 치고 다시는 응시 못 하게 하였다 하니 아, 슬프다. 공이 진정 졸한자인가 급은 길로 벼슬을 구한 것은 선 비가 할 일이 아니로다. 새져 가로되 나를 위하여 배운것이요 그가르쳐 구한 것이 아니로다 學以爲己非其誦流 어버이를 위하여 벼슬 하니 안찰(按察)사에 구폈다 任以為親屈於督郵 높은 무덤이 있고 흰돌이 있으니 有擴单而有石皎而 정성스런 효자를 새겨 표하리라 盹盹孝子刻而表之 유명조선국통훈대부행예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조공묘갈명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禮曹正郎兼春秋館記注館趙公墓碣銘) 崇禎紀元後三己巳五月 立 통훈대부이조참의겸규장각검교직각(通訓大夫吏曹參議兼奎章閣檢校直閣) 풍산(豐山) 홍석주(洪爽周)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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